행복한 가정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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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놀이마당에서 열린 '사랑의 송편 빚기'행사에서 다문화 주부, 주민 등이 오색 송편을 빚고 있다.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놀이마당에서 열린 '사랑의 송편 빚기'행사에서 다문화 주부, 주민 등이 오색 송편을 빚고 있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하나씩은 있을 겁니다. 물론 보통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겠지만요. 오늘 소개할 주인공은 탈북해서 남한으로 가 사랑하는 가족을 지켰다고 말하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조경호 씨 입니다.

조경호: 얼굴에서 항상 웃음꽃이 피는 그것이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조경호 씨는 기자와 전화통화를 한 그날 밤 보통 때와 마찮가지로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고 했습니다. 경호 씨는 지난 2004년 8월에도 RFA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는 “자식이 커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겁이나요. 아버지로서 아버지 구실도 못하고 애를 학교에도 못 보내고 여기까지 오게 하는게...이제는 성장 시기도 다 끝나가잖아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잠시 당시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들은 15살, 딸은 17살이었는데요. 탈북해서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북송을 당한 후 온 식구가 온성 보위부 감옥과 무산군 안전부 등에서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재탈북에 성공해 모스크바에서 아이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먼저 남한에 간 조경호 씨가 아이들과 헤어진 후 2년만에 남한에서 재회를 하고는 그때 심정을 말했던 겁니다. 이제 딸은 장성해 시집을 갔고 아들은 조만간  결혼을 시켜야 겠는데 사정이 좀 여의치 않아 걱정이랍니다.

조경호: 우리 사정이 되면 보내줘야죠. 남이 귀하게 키운 딸을 그냥 데려오면 안되잖아요. 한 5년 만난 것 같습니다.

기자: 2003년 남한에 도착하기 전 강제북송도 당했고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남한에 입국하셨는데 그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조경호: 그것이야 솔직히 말해서 자유를 찾아 온 것 아닙니까?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자유이지 않습니까. 애들은 내가 겪은 환경이 아닌 곳에서 키우려고 집사람과 떠난 것인데…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을 수 있는 곳에 왔으니 저는 행복하죠.

자식들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경호 씨. 북한에서는 소처럼 매일 열심히 일해도 대가는 차려지지 않았고 건강마저 잃게 되자 더 이상 무산에서 살 수가 없었답니다.

조경호: 우선 첫째 김부자의 우상화.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법, 모든 사람은 그 우상화에 따라 움직이니까. 자유라는 것은 없죠. 내가 떠는 것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길이었어요. 그때 당시 직장을 나가서 일해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병원생활을 북한에서도 많이 했어요. 우리는  아무리 아파도 직장에 가야 해요. 완쾌가 안돼도 가야해요. 직업이 당시 건설업이었어요.

기자: 그때 당시라는 것은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경호: 1992년 일거예요.

1990년 초반에 탈북했다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인데요.

조경호: 1993년 중국에 갔어요. 그때는 그냥 혼자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볼까 해서 갔다가  북한에 돌아갔죠. 그리고 북한에서 다시 떠날 때 집사람을 데리고 가족과 떠났어요.

천신만고 끝에 남한에 도착했을 때도 그리 건강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강제북송 당해서 그리고 남한행을 하는 과정에 몸을 돌보지 못했던 후유증이 조 씨를 괴롭혔습니다.

조경호: 처음에 여기서 내가 쇼크 상태에 빠진적이 있었어요. 늑막염이라고 배에 물이 차는 병을 앓았어요. 너무 안 좋아서 쇼크 상태까지 갔다가 많이 좋아졌어요.

기자: 완치가 됐습니까?

조경호: 완치가 안되는 병이랍니다.

기자: 북한에서부터 있던 병이었나요?

조경호: 다시 북송돼서 내가 맞아서 생긴 병입니다.

1년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구타를 당했던 것이 평생 장애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자: 이젠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남한생활 불편함 없이 괜찮으신가요?

조경호: 생활하는 것에는 우리가 일하면서 자유롭다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내가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북한은 없습니다. 여기와서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사는 맛이 날 것 아닙니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나를 알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16년을 살면서 크게 돈을 모은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은 없지만 인간관계는 잘 맺었다는 조경호 씨. 사람을 보면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하고 진실하게 상대하다 보면 절대 손해보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조경호: 사람 사는 세상은 똑같습니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습니다. 인간세상이 사기치는 것도 있고 반대로 예의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기치는 사람보다는 도와주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기자: 행복했던 순간은 어떤 때였습니까?

조경호: 많지요. 때로는 말 한마디가 힘이되는데요. 추석인데 너 뭐하냐? 우리집에 오라. 그말을 했을 때 말한마디가 천금을 주고도 못 사요. 아이를 데리고 자기집에 놀러오라고 했을 때는 그게 지나가는 말이라도 얼마나 고마워요.

그리고 오늘 이순간 가장 감사한 것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한에서 자유를 누리며 배고프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조경호: 내 가족을 지키고 가정을 지킨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우선 첫째 집사람에게 고맙고요. 집사람이 없었으면 가정도 이만큼 안됐겠죠. 둘이 손잡고 왔으니 이렇게 된 것이겠죠.

건설일을 하다가 이젠 육체노동을 쉬고 친구가 하는 사업장에 나간다는 조경호 씨. 큰 욕심 내지 않고 항상 가족의 얼굴에 웃음 꽃이 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조경호: 나는 딴 것 없습니다. 집사람이나 저나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그저 온가족이 오손도손 아이들만 잘 된다면 되죠. 큰딸은 시집갔으니까 행복하게 잘 살면 좋고요. 남들에게 손가락질 않받고 평범한 일상 주민으로 살 수 있으면 되지 별다른 것이 없잖아요. 행복하게 살고 사회생활에서 법을 지키고 사는 그런 아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무산 출신의 조경호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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