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표고버섯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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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민이 표고버섯을 정성스럽게 수확하고 있다.
한 농민이 표고버섯을 정성스럽게 수확하고 있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삶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북한에서 하던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15년차 최지수 (가명) 씨의 이야기 입니다.

최지수: 아직은 배울 것이 많죠. 토양에 대해 과학적으로 배우지 않고 그냥 씨를 뿌릴 시기만 알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지 토양까지 알자면 아직 멀었어요.
땅에 대해 아직 더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함경남도 덕성군 출신의 최 씨는 현재 남한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최 씨는 북한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전혀 계획에 없던 탈북을 하게 됩니다.

최지수: 저는 1997년 21살에 탈북했어요. 제가 돌격대 출신이에요. 북청에 있는727 돌격대에서 회계를 봤어요. 거기가 농촌 돌격대다 보니 1년씩 교대로 가야 되요. 언니가 돌격대를 가게 됐는데 약혼 날짜도 잡히고 시집을 가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가라고 했어요. 시집가지 전에는 1년씩 의무적으로 가야 하거든요.

기자: 회계일을 하셨다고 했는데 거기 돌격에서는 뭘 하는 겁니까?

최지수: 농촌 물길공사를 하는 돌격대죠. 언니 대신 1년을 갔고 내 몫으로 1년을 더해서 2년을 했죠. 그런데 교대자가 안 오는 거예요. 나중에 한 사람이 왔는데 우리는 농민이라서 1년 분배를 12월에 주는데 그 사람은 다음해에 먹을 수 있는 분배를 타고는 1월에 온 거예요. 그래서 그 집을 갔더니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딸을 먹일 것이 없으니까 딸을 돌격대로 보낸 거예요. 돌격대는 공동으로 먹기 때문에요. 그 아버지가 중국 연선을 가서 돈을 벌어 와야 식량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중간에 도망을 칠까 봐서 내가 따라 갔는데 국경을 넘자 마자 저를 팔아먹은 거예요

최 씨는 중국생활도 순탄치 않았지만 한번 북송까지 당하면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탈북에 성공해서는 남한행을 하는데요. 초기정착 시절에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젠 완전히 정착해 안정을 찾았습니다.

최지수: 제가 오늘까지 살아보니 처음에 탈북자 정착교육을 할 때 한가지 일만 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처음에 도배사로 아파트 현장에서 일했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하지만 회사 나가는 것 보다 급여가 많아서 몇 년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포크레인 자격증을 따서 그 일을 하는데2009년 당시에는 한국 노동현실이 힘들었어요. 포크레인 기사들이 아침 해 뜨면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일했어요. 너무 힘들고 어려운 거예요. 포크레인 기사는 남자가 90퍼센트인데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고 회사를 들어갔어요. 기술을 하지고 회사에 가서 회계를 해보자 하고 회계 자격증을 땄어요.

서른 살 초에 시작한 남한생활은 처음 벽지를 바르는 도배 일부터 시작해 포크레인 중장비 자격증을 따고는 건설 일도 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노동 보다는 최 씨가 다루기 좀 쉬운 일을 찾게 만들었는데요. 그러던 중 찾았던 일터가 집에서 너무 멀어 차를 샀습니다.

최지수: 차 월부가 한 달에 15만 8천원인데 월급이 85만원이었어요. 주 5일 근무하고 임대료 내고 뭐 하고 하면 남는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 5일 아니고 6일 근무를 하자 해서 양말공장에 갔어요. 12시간 맞교대로 7개월 일하고는 뇌경색으로 쓰러졌어요. 팔을 한쪽 못쓰고 다리가 불편해서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그때 도라지를 심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는 뇌경색이 와서 전자파가 싫어서 전자제품은 다 끄고 살았는데 밖엘 안 나가니까 언니들이 와서 날 데려 나가서 밥을 사주고 그러는 거예요. 집안에 있으면 더 아프다 나와라 그렇게 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언니들한테 도라지를 해주니까 언니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일한만큼 최 씨의 수입은 늘었지만 건강을 헤쳤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나하나 장만한 가전제품도 늘고 자기 차를 운전하면서 생활은 이전보다 편리해졌지만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과 더 가까운 농촌으로 가자는 것이었죠.

최지수: 그래서 그때가 2010년도인가 됐는데 제가 전업으로 농사를 하자 해서 농촌진흥청에서 귀농 귀촌 교육을 하는데 한국 분들은 80만원을 냈는데 탈북자는 무료로 해줬어요. 교육을 받아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귀농자금을 3억 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하자니까 담보대출인 거예요. 그래서 교육을 받으면서 한국 분들은 재산이 있으니까 가능하지만 우리는 담보 설 것이 없으니까 안 되는 것 아닌가 해서 다음해에 5천만원을 주는 프로그램을 재단에서 했어요. 탈북자가 귀농하면 내가 1억을 투자한다 할 때 그 금액의 절반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요.

땅값이 비싼 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우선은 지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 준비가 필요했는데요. 농부가 되기 까지는 지인들의 칭찬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최지수: 처음부터 농사를 한 것은 아니고 직장을 다녔는데 아파트 베란다에서 야채를 심었어요. 씨를 뿌리고 심고 했는데 처음에 도라지를 심었는데 한 3년 있으니까 꽤 크더라고요. 봄에 뽑아서 옆에 있는 한국 언니들을 줬는데 무쳐먹더라고요. 이른 봄에는 보통 도라지가 쓴데 안 쓰더라고요. 갖다 줬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더 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야채를 심었는데 그때 한참 친환경농산물이 유행이었는데 이거는 벌레 먹어도 그냥 먹어도 된다면서 와서는 한국 언니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옛날엔 농민이었는데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사방을 둘러보면 놀고 있는 땅이 지천에 널렸지만 정작 최 씨가 작물을 심을 수 있는 소유의 땅은 없었습니다. 최 씨가 언급했던 것처럼 초기 자본금이 필요했는데요. 혼자 할 수 없다면 둘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지수: 이제 귀농하려면 시골에 땅이 있는 남자를 만나야겠다 하고 선을 보고 땅이 있다고 해서 결혼을 했는데 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지역에 있는 신문을 보고 땅이 있다고 하면 산꼭대기까지 찾아가서 보고 했는데 그래도 내가 돈이 없으니까 내가 살 땅이 없는 거예요. 그때 누가 영광 쪽에 700평 아로니아 농사를 짓는데 해보지 않겠는가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갔더니 나한테 농사를 지으라고 하더라고요. 아로니아는 힘들지 않고 단순하니까 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기자: 아로니아라고 특용작물을 재배하셨는데 지금은 어떤 작물을 하고 계시나요?

최지수: 고구마 하고 옥수수 조금 하고 고추하고 콩, 표고버섯이요

땀 흘려 재배한 작물을 통해 충분한 경제적 보답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최 씨. 현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쳐서 살던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매일 조금씩 자라는 농작물을 가꾸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합니다.

최지수: 표고는 내가 노력하는 만큼 갖다 주더라고요. 농사는 봄에 오이를 심든 뭐를 심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표고는 한 번 실패 하면 그것을 버리고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일년에 3번 정도는 다시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힘들어도 실패 원인을 찾아서 다시 하면 또 일어설 수가 있으니까 매력적이라고 보거든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 15년차로 버섯농사를 하는 최지수 (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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