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소설가 도명학 ‘잔혹한 선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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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학 씨가 2017년 6월 경기도 모처에서 통일강연을 하는 모습.
도명학 씨가 2017년 6월 경기도 모처에서 통일강연을 하는 모습.
/도명학 씨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남에게 드러내놓고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아가 좋은 예술품으로 이를 승화시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굉장한 일인데요. 북한에선 양강도 지부 소속 시인으로 활동을 하다 남한에 가서 소설가 그리고 북한인권활동가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어 소개 합니다. 오늘은 소설가 도명학 씨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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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학 소설집 '잔혹한 선물' 책 표지.
도명학 소설집 '잔혹한 선물' 책 표지.

지난 2006년 탈북해 제 3국을 거쳐 남한으로 직행한 도명학 씨는 남한 도착 첫 느낌을 이렇게 말합니다.

도명학: 그 느낌은 감격스럽고 또 놀랍고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죄스럽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2학년 때 중퇴 통지서를 받았고 이후 고향인 양강도로 내려가 탈북 전까지 혜산방직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작가동맹 맹원으로 활동했는데요. 발표하지 않고 습작 노트에 써놓았던 ‘곱사등이들의 나라’란 시가 문제가 됐습니다.

도명학: 한마디로 말하면 체제에 대한 비난의 시나 같은데 지금도 그렇겠지만 북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장사를 많이 다녔잖아요. 열차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보면 짐이 없거나 가방 하나 살짝 들고 다니는 사람은 고위간부들 빼고는 없어요. 다들 무거운 등짐을 지고 다닌다고 봐야죠. 그것이 시인의 시각으로 볼 때 모든 국민이 허리를 펴려야 펼 수가 없는 곱사등이가 돼버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시상을 받았거든요. 사실상 곱사등이 장애인은 아니지만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북한주민의 처지를 본 거죠. 또 등에 짊어진 생존의 등짐도 무겁지만 그 등짐 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 체제의 중압감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곱사등이처럼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공화국의 현주소다 그러한 시죠.

도 씨가 북한사회를 비판적 시각으로 본 것은 구 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이 연속적으로 무너질 때였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 신념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외부 라디오를 많이 듣기 시작했고 중국을 오가는 조선족을 통해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알면서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데요.

도명학: 사회주의 그 이념 자체가 역사의 큰 오류라는 것을 인식했죠. 하지만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거기에 순응하고 사는 곱사등의 삶이었죠. 1995년 이후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유래 없는 대형 아사가 벌어지잖아요. 그것도 목도 하면서 절망을 느끼고 시를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를 쓰지 않으면 안됐던 사정들이 있죠. 그것이 또 저뿐만 아니라 북한 작가들의 삶이고 그런 거죠.

시인이 자기 속마음과 다른 시를 쓴다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는 도명학 씨는 만약 내가 쓰고 싶은 시를 쓴다면 어떤 시를 쓸 것인가 하고 한 번 써본 것이 ‘곱사등이들의 나라’였습니다. 이 시를 쓰면서 가슴이 시원해 지고 카타르시스까지 느꼈다고 했는데요.

도명학: 정말 그런 시라도 마음대로 쓰고 싶더라고요. 북한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없다 보니까 고통에 죽어가는 사람들조차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수가 없는 그 자체가 숨막히잖아요. 그러한 심정이 결국은 발표도 할 수 없는 시를 써서 원고로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걸 어디 보여줄 수도 없는 상태였는데 저와 뜻이 통하는 사람이 거기에도 꽤있었어요. 그 중에서 친구를 한 명 사귀었는데 저처럼 시인은 아니고 사진작가였는데 그 친구에게 시를 보여줬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보위부 밀정이었어요. 그 친구가 시를 어느 틈엔가 사진을 찍어서 보위부에 제출한 거예요.

양강도 보위부 감옥살이를 2년 넘게 하면서 죽다 살아난 도 씨는 석방 후 결국 압록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지난 2012년에 탈북작가들의 모임인 ‘망명북한펜’이 조직될 때 사무국장을 맡아서 남쪽에서 소설가로 등단 합니다.

도명학: 시를 안 쓴 이유는 가장 남북한의 문화 장르 중 이질감이 심한 것이 시더라고요. 그래서 시는 못 쓰겠고 했는데 소설은 한 번 해 볼만 하더라고요. 추구하는 주제는 달랐지만 구성법, 서술은 별 차이가 없고 해서 2013년 ‘재수없는 날’이라는 단편으로 한국 소설가 협회라는 단체를 통해 등단했어요.

2018년 9월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한 권의 소설집 ‘잔혹한 선물’이 발간됩니다.

도명학: 그 작품은 어떤 입장에서 썼는가 하면 남쪽에 온 탈북자로 쓴 것이 아니라 그냥 북쪽에 사는 작가로 가정하고 썼어요. 만약 북한에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북에서 이런 소설들을 써야 하지 않았겠는가? 또 써질 것이라는 시각에서 작품 소재를 골랐기 때문에 저의 작품은 다른 탈북자 소설과 뭐가 다른 가 하면 북한 내부의 다양한 사람들의 생활, 세태를 통해서 문학적으로 그 속에서 체제적 모순이라든가 무너져가는 공동체와 변화되어가는 체제의 변질과정들을 들여다 볼 수 있게 이데올로기 보다는 사람들의 생활을 그렸어요.

기자: 이제 남한생활 14년이 되셨는데 어떻게 남한 세상이 살만한 곳이란 생각이 드십니까? 잘 왔다고 생각 되시는지요?

도명학: 당연히 잘 왔죠. 여기는 본인이 얼마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노력을 하는가에 따라 분명히 대가가 차려지는 곳이거든요. 여기는 제도적인 제약이 없단 말이죠. 일단 인간의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결과물이 좋은가 조금 기대보다 아쉽다 이런 차이는 있지만요. 전반적으로 그런 것이 좋고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란 측면에서 그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그것이 바로 자유겠죠.

남한에서 소설가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책이 팔려 버는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는데요. 그의 다른 직업은 전기기사입니다.

도명학: 여기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있잖아요. 제가 여기 와서 전기기술을 배웠어요. 자격증을 따서 아파트 전기설비관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는 그런 일은 아니죠?

도명학: 그러니까 필요하면 직원으로 활동할 수도 있고 아르바이트 식으로 요구할 때도 있고 그렇게 활동하죠.

기자: 그러니까 주 수입원이 전기일 하시는 건가요?

도명학: 그렇죠. 현재로선 주 수입이 그거죠. 학원에 6개월 정도 학원 다녔고 제일 낮은 단계 전기기능사 자격을 따고 전기 일을 가리켜 주는데 가서 1년정도 일해서 전기기사를 땄습니다. 그 정도면 어디 가서도 일감은 떨어지진 않습니다.

결코 만만하지만은 않은 생활이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속마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산다는 소설가 도명학 씨. 그는 창작활동뿐만 아니라 북에 있는 고향 사람들을 위한 인권개선 활동에도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도명학: 현재는 자유통일문화연대라는 단체를 하나 만들었는데 여기는 글 쓰는 사람도 있지만 영상 만드는 사람, 영화 만드는 사람 여러 가지 문화 예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북한 실상을 알리고 통일에 대한 비전을 주는 활동을 하고 있고 앞으로의 계획은 나도 나이가 더 먹기 전에 작품에 주력해서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써야죠.

제 2의 고향 오늘은 탈북 소설가 도명학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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