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극복하는 용기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3-24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대구의 한 화장품 매장에서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대구의 한 화장품 매장에서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정말 열심히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뜻데로 안될 때가 있습니다. 몸은 몸데로 지치고 정신마저 혼란스러 주저 앉고 싶은데요. 하늘이 무너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죠. 이미 맞닥뜨린 고난을 다시 한 번 힘차게 딛고 일어서려고 노력한다는 함경북도 무산군이 고향인 최미라(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

최미라: 내가 그 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냐면 내가 처음 그 일을 시작하기 전 단계로 돌아가자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어요.

남한에서 시작한 무역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밤낮없이 뛰어 다녔건만 어째서 이런  시련을 계속해서 주는 것인지 하늘마저 원망스럽습니다. 당연히 첫번째 시련은 탈북입니다. 1998년 탈북당시 최 씨는 북한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지도 그리고 알려고도 안했습니다.

최미라: (탈북) 당시는 그저 배고파서 나온 거 맞잖아요. 사람들은 왜 그 사실을 감추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북에 있을 때 다른 고장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 지 누가 알아요. 여기처럼 차가 있어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누가 잘살고 못살았는지 알 수 있겠지만 북한은 서로 몰라요. 내고향 사람 아니고는 모르죠. 1996년부터는 남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진짜 힘들었어요. 11살에 아버지 기차사고로 돌아가셨고 16살에 어머니 돌아가셨고 우리집은 최악이었어요. 진짜 너무 배고파서 그때 배추 뿌리도 뽑아 먹은적이 있어요.

2008년 최 씨가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요. 최 씨의 두번째 시련은 남한에 도착하기 전 탈북과정에서 벌어졌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남한행을 하다가 제3국 이민국수용소에서 출산을 했던 겁니다. 그렇게 영아와 함께 시작한 남한생활 초창기에는 심신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려서 변화를 줬던 것이 화장품 가게를 하면서 입니다.

최미라: 신랑한테 그랬어요. 남들이 화장품 팔면 돈 많이 번데 얘기를 했어요. 잘 사는 형제도 많으니까 가서 돈을 빌려서 종잣돈 해서 한 번 해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신랑이 행동에 옮겼어요. 보따리 장사 비슷하게 하려고 처음에 난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커지더라고요. 화장품 가게를 하나 차렸는데 그게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해서 제가 3년 반을 장사를 했어요.

한국에서 화장품을 떼다가 중국에 파는 것이었는 데요. 물들어왔을 때 노저으라고 한국의 드라마, 음악  등으로 중국에서 한국 화장품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장사가 잘 되자 경쟁이 심해졌고 갑자기 사업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중국에서 한던 사업도 접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사업이 도라지 무역. 이것이 세번째 시련입니다.

최미라: 그러니까 중국에서 저한테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중국에 작년에 비가 엄청 많이 왔었잖아요. 그래서 도라지가 많이 썪었었어요. 겉보기에는 안썩었는데 도라지가 얼었던 거죠. 몽골 쪽에서 오는 도라지도 같이 섞어서 저한테 보내다 보니까 몽골 쪽은 많이 춥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얼었던 거죠. 얼었던 도라지가 여기까지 오면서 녹아 물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하얀 도라지가 투명한 도라지로 변하는 거예요.

기자: 그러니까 팔 수가 없는 거네요.

최미라: 그럼요. 저는 상인들한테 가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예요. 그때 생각했던 것이 내가 거짓말을 안하고 싶어도 하늘이 날 안 도와주면 안되더라고요.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아니라고 해도 아니잖아요. 분명히 못 먹을 도라지를 가져왔는데…그냥 가는데마다 욕 얻어 먹었어요.

장사는 신용이 생명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팔 수 없는 물건을 공급한 사람을 믿어주는 가게는 없었습니다.

최미라: 밤이면 2시 3시 남들이 다 잠잘 시간에 나는 돌아다니면서 도라지 사주세요 하면서 하나씩 뚫은  가게 주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하니까 죽을 맛이더라고요.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었어요.

기자: 물건을 보낸 곳에는 항의를 하고 보상을 받았습니까?

최미라: 제가 난리를 처도 소용이 없어요. 자기네는 똑같은 물건을 딴곳도 보내고 여러 곳으로 보냈는데 왜 거기만 그러냐고 그렇게 얘기를 해요. 처음에는 좀 인정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네도 우기면 약자는 우리에요. 내가 현금을 주고 가져 온 것이 아니고 그쪽에서 물건을 주고 나중에 지불하는 것으로 해서  한 거잖아요. 돈이 많아서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우리가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서 뚫었던 가게였는데, 자신을 믿고 받아준 도라지가 그모양이었으니 거래처 사장님들에게도 손해를 끼쳐 마음이 더 아프답니다. 지금은 무역업도 폐업신고를 한 상태입니다. 왜 이런 시련이 살만하면 계속 터지는 것일까?

최미라: 손해만 본 거죠. 그냥 내가 있는 돈까지 모두 까먹고 나니까 나는 정신을 차렸는데 신랑은 대출을 더 받아서라도 계속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이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니까 여기서 끝내자고 했어요. 내가 뛰면 뛸수록 더 나락에 빠지니까 내가 그랬어요. 힘들게 살아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니까 나한테는 어디까진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

남한생활도 10년이 넘다 보니 이제는 어색한 것 없이 적응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질 않습니다.

최미라: 예전에는 남이 말을 하면 내 주장이 강해서 많이 우겼는데 지금은 그냥 순리대로 누가 좀  아프다고 하면 아, 그래 아파서 어떻게 이러는데 예전에는 아파 그럼 내가 약 갖다 줄께 이랬는데 지금은 변했어요. 얼마전에 친구가 남자친구하고 헤어졌는데 내가 뭐라고 했냐 하면 그 친구가 잘헤어졌지 해서 내가 잘해어졌네 그랬는데 친구가 뭐 잘해어졌다고 그러는 거예요. 난 위안을 주려고 그렇게 얘기를 했었거든요. 내가 오늘 다시 전화를 해서 서운했지 그랬더니 친구가 응 조금 너라면 왜 헤어졌냐고 그렇게 얘기해줄지 알았는데 좀 서운했데요. 내가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거예요.

최 씨는 살아온 인생이 그랬듯 지금 현재는 아프고 힘들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일어나 멋진 내일을 설계할 겁니다.

최미라: 김치봉사할 때도 가고 노숙자들 빵 나눠 주는 것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것도 있고 한데 살다보니까 겪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그냥 돈주고 경험을 남들이 못하는 경험을 했잖아요. 이제 후회는 하지 말아야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최미라(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