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아카데미 상 수상과 남북한 영화교류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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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까지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오리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까지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오리고 있다.
/AP Photo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한국영화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전 세계가 놀라운 눈으로 한국영화를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남북한의 영화계를 둘러보고 아카데미 상을 받은 기생충 영화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임채욱 선생: 영화 <기생충>은 작년 개봉 이래 받은 상만 해도 이미 50개가 넘었습니다. 이번에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영화상을 받았으니 어떤 영예보다 더 영예스럽습니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4개 부문을 휩쓸었으니 우리나라 영화 101년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성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작품내용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다룬 아주 보편적인 소재였다지요?

임채욱 선생: 그렇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걸 부자는 나쁘고 가난한 사람은 착하다는 2분법적인 뻔한 이야기로 다루지 않고 가난한 사람끼리도 서로 이권을 다투는 이야기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빈부격차를 영화의 틀로 삼았지만 결국은 인간의 본성이 어떤가를 탐구한 내용이지요.

영화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반 지하방과 부자의 대저택이 대비되면서 보기에 따라서는 계급투쟁의 문제를 다뤘다고 말합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꼭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말한 것처럼 부자와 가난한 자가 다투고 불평등이 드러나는 계급간의 문제가 아니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을 비틀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래서 관심도 끌고 재미도 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빈부격차를 고발하면서도 그걸 뛰어 넘을 휴머니티를 그린 것이지요.

계급문제라든가 불평등 문제라면 북한에서는 이 영화를 대남 비난의 아주 좋은 대상으로 볼 수 있겠군요? 혹시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을 보인 것이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공식적으로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작년에 <기생충>이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이란 최고의 상을 받은 후 한 대외선전 매체에서 보도 한 일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차는 반 지하집과 언덕 위 현란하게 지은 호화판 주택, 부유층과 빈곤층의 하늘과 땅 같은 격차, 빈곤탈출을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하층민 생활과 그들을 하대하는 부자들 생활을 실감 있게 그렸다고 평가합니다. 또 이 영화가 상을 받은 사실도 언급하고는 가진 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차 넘치는 영화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금수저, 흙수저라고 하는 양극화문제가 극에 달해 있어 자본주의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의 악성종양을 안고 있는 병든 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 말합니다.

역시 북한다운 평이군요. 어떻든 남북한 영화수준은 아카데미 상 수상으로 그 격차가 판명 난 것이지요? 최근 북한영화는 어떤가요?

임채욱 선생: 선대통치자 김정일은 영화광이라고 알려졌고 영화제작 수준을 높인다고 신상옥, 최은희를 납치해서 데려가기도 했는데 그때는 국제영화제 수상기록도 세웠지요. 제작도 활발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영화는 김정일이 관여하게 되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양적인 성장을 합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이 실명으로 나오는 혁명영화를 장편물로 제작하는데 이 때 나온 것이 <조선의 별>시리즈이고 대남 첩보물로 만든 <이름없는 영웅들>입니다. 1980년대에는 국제영화제에 작품을 내놓기도 하고 북한 영화인들이 소련을 방문하면서 소련과의 합작영화도 나오고 또 중국과의 합작영화도 나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됐지요.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영화계는 위축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현재 통치자 김정은 시대에서도 아직 활발한 모습은 드러나지도 않고 가늠되지도 않습니다.

한국영화도 1970년대부터 발전이 됩니까?

임채욱 선생: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영화는 1970년대 오히려 침체를 거듭합니다. 텔레비전 시대가 본격화되니까 다른 레저도 많아지고 영화제작을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하도록 영화법이 바뀌었지요. 또 유신체제 때라 검열도 강화돼서 영화인들이 힘들었지요.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영화정책도 바뀌고 영화인들도 분발하게 돼서 1987년 임권택감독의 <씨받이>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이게 국제무대에서 받은 최초의 상일 겁니다.

분단 후 남북한에서는 영화제작 조건이 다 열악했을 테지요?

임채욱 선생: 물론이지요. 한국에서는 1946년에 <자유만세>(최인규)라는 영화가 제작되면서 그 한해만 해도 <안중근사기>(이구영), <3.1혁명기>(윤봉춘)가 나옵니다. 이듬해 1947년에 <해방된 내고향>(김창근), <유관순>(윤봉춘), <불멸의 역사>(김영순), <새로운 맹서>(신경균) 등의 작품이 나옵니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는 <민족의 새벽>(이규영), <독립전야>(최인규)가 나옵니다. 대개가 민족의 고난과 광복의 기쁨을 다룬 영화지요. 1949년이 되면 비로소 <마음의 고향>(윤용규), <파시>(최인규) 같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옵니다. 다음해가 되면 전쟁으로 영화인들은 촬영기재까지 잃어버리니 영화제작은 주저앉고 말지요.

북한은 어떠했습니까?

임채욱 선생: 제작사정이 나쁜 것이야 북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니 광복 직후에는 소련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할 수밖에 없었지요. 기록을 보면 1949년 한 해 소련에서 수입한 영화가 극영화 123편, 기록영화 73편, 뉴스영화 110편이었습니다. 1949년에 국립영화촬영소가 생겨서 문화영화를 촬영했고 이듬해 처음으로 극영화 <내고향>(김홍식)이 선을 보였습니다. 전쟁 후인 1955년 극영화 2편, 기록영화 9편, 뉴스영화 63편이 제작됐는데 1960년이 되면 한해 182편의 영화가 제작됩니다. 전후 복구를 끝내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분계선 마을>같은 북한이 내세우는 영화가 이 해에 제작됩니다. 이후 <정방공>(1963), <유격대 오형제>(1968), <피바다>(1969), <꽃피는 마을>(1970), <꽃파는 처녀>(1973),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1979) 등등이 북한에서 1970년대 말까지의 잘된 영화로 알려집니다.

현재 한국영화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임채욱 선생:  2019년 작년 한 해 한국에서는 120편 이상의 작품이 생산됐습니다. 연간 관객이 2억 2천만 명이라는데, 1000만 관객이 든 영화도 <기생충>을 포함해서 5편입니다.

남북한 영화인들의 교류와 협력은 어떤 방향이 좋을까요?

임채욱 선생: 작년 8월에 남쪽 강원도 강릉. 평창에서 남북평화영화제를 열면서 북한영화인을 초청했습니다만 무산됐습니다. 남한영화인이 북한에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라서 언젠가는 북한도 뒤따라 오리라 믿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교류행사가 성공하려면 우선 북한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계의 제작경험이나 세계시장 진출역량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겠지요. 그게 쉽지 않겠지요. 현재로선 남북관계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 또 북한영화가 지향하는 지점이 인민의 사상교양을 예술성에 실어야 하는 것이어서 주고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년이 우리나라에서 극영화를 우리 손으로 만든 100년이라 했습니다. 이 100년의 성취가 오늘날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임채욱 선생: 서양에서 영화가 들어왔을 때 그걸 본 그 때 사람들은 ‘귀신 조화 속의 물건’이라면서 “우리는 어느 때나 이런 묘술을 배워 익힐지 모르겠다”(황성신문)고 했답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습니까? 이제 그런 바램은 크게 이뤄져서 한국영화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문화적 창의성이 더욱 빛나게 발전되도록 해서 또 다른 <기생충>같은 작품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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