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동구권의 연좌제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08-06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스탈린(가운데)과 친한 동료들.
스탈린(가운데)과 친한 동료들.
Photo courtesy of Wikipedia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 교수님, 우리는 1930년대 소련 공산당 고급간부들의 권력투쟁과 숙청, 그리고 나중에 동유럽에서 벌어진 같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당시에 처형된 고급간부들의 가족들도 처벌이나 처형 받은 사례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북조선에서는 박헌영이나 최창익과 같은 인물들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 가족들까지 모두 다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소련이나 동구권은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북한과 비슷했지만, 북한만큼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당중앙 비서나 내각부총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의 부인이 처형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감옥으로 가서 옥사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1930년대 나이가 비교적 많은 소련의 혁명원로들은, 나이가 많아지는 부인과 이혼하고, 새로 젊은 여자와 결혼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하린과 카메네프 등 스딸린에게 패배한 대부분의 간부들은 서른 살 정도의 여자들과 새로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에 36세인 카메네프의 부인은 체포되고 처형되었습니다. 지노비예프의 부인의 경우 흥미롭습니다. 지노비예프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와 세 번째 부인은 체포되었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한 이후에 석방되었습니다. 둘째 부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숙청당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당시에 23세에 불과했던 부하린의 젊은 부인은 처형장으로 가는 운명을 피했습니다. 그 대신에 감옥생활을 오랫동안 했고, 50년대초에는 감옥에서 나왔지만 시골로 유배되었습니다.

전: 교수님, 스딸린은 왜 부하린의 부인을 살려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소련에서는 연좌제가 시행되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흥미롭게도 스딸린은 딱 한 번 연좌 원칙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 있습니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소련에서 공식적인 입장은, 숙청당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의 가족들은 차별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말뿐이었습니다. 고급 간부들이면 배우자와 다른 가까운 친족, 가족들도 그 때문에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급간부가 아닌 경우라면, 대부분 숙청당한 간부나 지식인의 가족들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국가비밀에 접근하는 건 문제가 있을 수 있었고, 스딸린 사망 때까지 그들이 재기하는 건 어려웠지만 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전: 그렇다면 숙청당한 고급간부의 자녀들은 어떨까요?

란코프: 어떤 경우에는 처형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감옥으로 갔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북한과 달리 어린 자녀들은 아예 감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부터 정치범관리소에 학교까지 있는데, 유아와 어린이들이 부모와 같이 관리소에 끌려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소련에서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경우 숙청된 고급 간부의 아들이나 딸은, 20세 정도 된 다음에 체포되었습니다. 즉,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체포했습니다. 그래도 조금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조용히 산 자녀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부하린의 장남은 부하린의 처형 당시에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런대로 약간 이름세 있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숙청 고위 간부의 성인 자녀들도 1953년 스딸린 사망 직후에는 모두 다 석방되었습니다.

전: 스딸린이 숙청한 고위 간부들의 자녀들이 미성년일 때는 체포하지 않고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네요.

란코프: 물론 스딸린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러시아나 동구라파 정치문화를 보면, 연좌제 원칙이 별로 없습니다. 가족 잘못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유교문화가 심한 북조선에 비하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조선은 출신성분이라는 이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나 동구라파에는 그런 것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에서 북한처럼 삼족을 멸하는 제도가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에 감옥으로 간 고급간부의 가족은 절반 정도 옥사하거나 처형되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살아남았습니다. 동유럽을 보면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체코나 불가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숙청된 고급지도자의 가족들은 처형된 사람도, 옥사한 사람도 있었지만 소련보다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았습니다. 동구라파 국가의 경우, 숙청당한 고급간부 집의 가족과 친족 가운데, 처형되거나 옥사한 사람들의 비율은 1/3에서 1/4에 불과했습니다.

전: 1953년 스딸린이 사망한 뒤에 수감돼 있던 고위간부 가족들은 모두 다 석방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출감한 뒤에는 무슨 보상이 있었습니까?

란코프: 많지는 않지만 조금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매우 흥미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소련 최고 간부계층 출신들은 10-15년동안 감옥에서 고생했지만, 석방된 이후 놀라울 만큼 빨리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고 성공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반광부나 노동자 생활을 한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메네프의 후손을 보면, 그는 아들 세 명이 있었습니다. 두 명은 아버지를 따라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명은 살아남았고, 나중에 박사학위를 받고, 소련의 유명한 대학에서 학부장까지 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형된 아들들의 자녀들, 즉 카메네프의 손자들은 세 명 있었는데, 모두 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잘 살고 있습니다. 부하린의 손자는 지금 러시아에서 잘 알려진 축구 전문가입니다. 축구에 재능이 많은 어린이들을 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전: 교수님, 석방된 사람들 가운데 반정부활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1960-70년대 소련에서 반체제 활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숙청된 고급 간부들의 가족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1953년 스딸린 사망 이후에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새로운 생활에 열심히 적응하려 노력했습니다. 결국 1930년대 스딸린에 의해서 제거된 고급간부, 즉 정치국위원이나 소련군대 원수들의 가족들 가운데는 유명한 기자, 학자, 교수, 기술자 등이 많습니다. 그들 가운데 1990년대나 2000년대 미국을 비롯한 기타국가로 이민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당시에 숙청을 주도한 사람들의 후손들도 외국으로 많이 이민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 숙청 주도자라면 스딸린 쪽인가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말씀 드리겠지만, 스딸린, 흐루쇼프 등의 후손들 가운데 미국이나 영국으로 간 사람이 많습니다. 흥미롭게도 소련공산당 고급간부의 후손들 가운데에 아직 사회주의를 공식적으로 운운하는 국가로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중국에 간 사람이 없고, 쿠바나 북한으로 간 사람도 없습니다.

전: 교수님, 스딸린의 후손도, 부하린의 후손들도 지금 다 잘 살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란코프: 간단하게 말하면, 교육과 관계의 힘입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