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대외정책과 대중국 공포 (7)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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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내몽골의 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시에서 몽골과 중국 어린이들이  함께 등교를 하고 있다.
1980년 내몽골의 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시에서 몽골과 중국 어린이들이 함께 등교를 하고 있다.
/AP Photo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우리는 공산주의 몽골 그리고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민주 몽골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소련/러시아와의 관계를 많이 살펴 보았습니다. 사실상 몽골 인민 공화국은 소련의 위성국가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다른 나라와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특히 접경국인 중국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제가 보니까 지난 100년 동안의 몽골 역사를 잘 이해하기 위한 기본변수는 바로 중국과의 관계입니다. 역설적으로 대몽골국이 1920년대 초 소련이 통제하는 국가가 되었던 이유는 중국 때문입니다. 청나라 시대, 몽골 사람들은 사실상 소수민족이었는데, 특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신해혁명 이후에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빨리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몽골 지배계층은 물론 일반 주민계층도 겁을 많이 먹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1911년에 몽골은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도망치기 위한 독립선언이었습니다. 물론 몽골을 전략적인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생각했던 러시아제국은 즉각적으로 이 상황을 이용했고, 몽골 독립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러시아제국이든, 제정 러시아를 대체하는 소련이든, 1946년까지 공식적으로는 몽골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 교수님, 지난번 얘기에서 몽골이 1946년까지 주권국가가 못 된 것은 중국 때문이라고 하셨는데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1915년에 러시아, 몽골, 그리고 중국은 조약을 체결했을 때 조약에 따라 몽골은 자치지역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권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흥미롭게도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에도, 소련은 옛날 제정 러시아의 몽골 정책을 그대로 지속했습니다. 한편으로 소련은 몽골을 완충지대로 필요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도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20-30년대 몽골을 지키는 군사세력은 몽골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전기자님은 당시에 몽골 인구는 얼마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글쎄요. 100만-200만명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란코프: 아닙니다. 훨씬 적습니다. 1920년대 초 기준으로 77만 입니다. 당연히 인구가 거의 없고 땅만 넓은 몽골은 일본이나 중국의 침략을 막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1939년에 ‘할힌골’ 전투가 있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일본과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은 몽골을 침략했지만, 패배로 끝났습니다. 당시에 몽골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은 군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소련군대입니다. 흥미롭게도 당시에 몽골에 주둔한 소련의 병력은 원래 6만명이었는데 나중에 10만명까지 증가했습니다. 그 후에도 소련 군대는 몽골에 계속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전: 일본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나요?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소련 군대는 1949년까지 여전히 몽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중국혁명 이후에 철수했습니다.

전: 왜 그 때 철수했습니까?

란코프: 공산 국가가 된 중국은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1945년 소련과 중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입니다. 이 새로운 조약에 의해서 당시 중국의 국민당
정권은 몽골을 주권국가로 인정했습니다. 전기자님은 대만에서 1980년대 발행한 지도를 보신 적이 있나요?

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란코프: 1949년,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장악했습니다. 패배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갔는데,
원래 국민당 정권은 몇 년 동안만 몽골을 독립국가로 인정했는데 1950년대 말에는 그 인정을 취소했고, 그 이후 거의 40년동안 몽골은 중국 땅이라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초까지 대만에서 나온 지도에는 몽골이 중국 땅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1946년까지는 몽골과 수교한 나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에 몽골의 수도에 주재한 유일한 외국 대사관은 소련 대사관이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들어와서는 기타 국가들도 차츰, 몽골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대사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영국은 1963년, 서독은 1974년, 프랑스는 1965년에 몽골과 수교했습니다.

전: 그런데 교수님, 왜 세계 주요 국가들이 몽골과 수교를 10년-20년 늦게 했을까요?

란코프: 쉽게 말하면 몽골은 경제력이나 국력이 낮고, 사실상 소련의 위성정권이었습다. 그래서 몽골에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중국은 여전히 몽골의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949년 이후에 짧은 기간 동안 중국은 몽골과 괜찮은 관계에 있었지만, 1950년대 말 중소 관계가 빠르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몽골은 소련과 손을 잡고 중국을 열심히 반대했습니다. 물론 당시에 몽골은 사실상 소련에 도전할 능력이 아예 없었습니다. 비록 몽골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신의 외교를 할 수 있었더라도 거의 확실히 소련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몽골 역사에서 중국에 대한 공포를 감안한다면 그 밖의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 1960년대 들어와서는 몽골과 중국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됐다고 하셨습니다. 1960대 중반
문화대혁명시대 때 홍위병들이 소련대사관도 포위했었다던 데요, 당시 몽골대사관도 공격했나요?

란코프: 홍위병이 몽골대사관을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몽골에 살았던 화교들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1961년 기준으로 몽골에서 화교, 즉 중국사람들은 2만 명 정도 살았는데요. 그러나 1960년대 초 그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원해서 간 사람들도 있었고 수많은 경우 압박과 민족차별 때문에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68년 초 남은 중국 화교들도 거의 모두 다 강제출국을 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몽골에서 계속 살아온 중국 사람들은 몽골인민공화국 국적을 받고 몽골사람과 결혼한 사람들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수천 명 정도 있었습니다.

전: 교수님, 중국 공산당 정부는 몽골에 사는 화교들이 고생하는 것에 어떻게 반응했나요?

란코프: 당연히 중국측은 이와 같은 몽골정책이 공산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산주의 원칙에 따르면 모두 다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말뿐인데요.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은 소수민족을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측이 1960년대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은 소련군대의 주둔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 소련군대는 다시 몽골에서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중국은 몽골주둔 소련군을 큰 문제라고 생각했고, 소련군대의 철수 없이는 중소관계 정상화가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몽골은 이러한 중국의 주장을 무시했고, 소련군대는 1980년대 말까지 몽골에 있었습니다. 병력은 3-4만명 정도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당시의 몽골군대보다 조금 더 많은 규모였습니다.

전: 1980년대말 소련군대가 드디어 철수했고, 얼마 후 몽골에서는 민주혁명이 발발했는데요, 민주국가가 된 몽골공화국은 지금 중국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란코프: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아직 의심과 불신감이 없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미국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 억제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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