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공산화 (2)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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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1961년 모습.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1961년 모습.
/AP Photo

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몽골인민공화국의 역사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초 몽골에서 공산주의정권이 탄생한 배경을 간단하게 다시 정리해 주시지요.

란코프 교수: 간단하게 말하면, 그 전에 250년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던 몽골은 1911년, 중국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신해혁명 직후에 독립선언을 했고 사실상 독립왕국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몽골의 독립 배경에는 제정 러시아의 지원이 많이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을 완충지대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1917년 러시아 공산당혁명 이후에 공민전쟁에서 패배가 임박한 백군의 일부가 몽골에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소련은 백군 잔당이 남아있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고, 1921년에 적군이 몽골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몽골이 진입한 공산당 세력은 적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17년 혁명 직후부터 소련공산당은 몽골에서 혁명세력을 키우려 많이 노력했습니다. 이 세력은 원래 몽골인민당으로 알려진 세력입니다. 나중에 이름을 몽골인민혁명당으로 바꿨는데, 사실상 몽골공산당입니다.

전: 몽골인민혁명당의 창시자는 누구일까요?

란코프: 우리는 옛날에 코민테른 이야기를 했을 때, 1920년대부터 소련이 전 세계에 공산당을 심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당시에 소련공산당의 외교전략이었던 코민테른의 전략을 살펴보면, 먼저 대상국가에 공작원들을 보내고, 이 공작원들은 좌익경향이 있는 현지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고, 공산당을 창당하기 위해서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1920년대 몽골에서 지식인들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몽골인민당 창시자들은 대부분이 어느 정도 글자를 읽을 줄 알고, 근대공업과 근대경제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학교 교수보다 숙련공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먼저 몽골인민당의 의장인 ‘솔린 단잔’은 원래 하급공무원이었습니다. 나중에 몽골인민공화국에서 국가 창시자로 인정을 받은 ‘수흐바타르’는 군인 그리고 인쇄소 직원이었습니다. 혁명직후에 수상이 된 ‘독소믄 보도’는 불교 학교를 졸업하고 하급 공무원으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소련은 인재를 찾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전: 직접 소련인들을 파견했나요?

란코프: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보다 더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몽골이라는 나라는 사실상 3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사실상 중국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중국영토 내몽골도 있고, 독립국가로 남아있는 외몽골도 있고, 17세기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영토인 부랴트 지역도 있다고 했습니다. 부랴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몽골족 대신에 부랴트 족이라고 부르는데, 사실상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언어이든 문화이든 비슷합니다. 1910년대 몽골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러시아에 속한 부랴트 지역에서는 상황이 훨씬 좋았습니다. 당시에 박사학위를 받은 부랴트 사람들도 있었고, 명문대학 교수로 지내던 부랴트 사람들도 있었고, 군대나 국가기관에서 중급 간부로 지내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연히 몽골말을 고향말 처럼 잘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1917년 혁명에 단호히 반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열심히 지지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소련공산당은 몽골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는 부랴트족 간부들을 몽골로 많이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 부랴트족 간부들의 면면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제일 중요한 사람은 린칭인 엘베그도지입니다. 그는 농민 출신이지만 능력이 대단해서 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러시아 귀족도 입학하기 어려운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대를 나왔습니다. 흥미롭게도 푸틴 대통령은 바로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얼마 정도 공무원으로 활동하다가 1917년 혁명 이후에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했고, 그 후 1920년 말에 코민테른에서 몽골 담당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몽골을 소련을 위협하지 못하는 완충지대로 만들고, 그곳에서 공산당정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몽골어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불어도 잘 알고, 능력과 열정이 많은 젊은 린칭인은 매우 정력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본부에 있기보다는 몽골의 혁명을 현지에서 지도하면 좋다고 결정했고, 몽골로 떠났습니다. 흥미롭게도 린칭인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전: 몽골의 공산주의 지도자와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 운동가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요?

란코프: 그의 부인은 러시아 교포, 즉 고려인 여자입니다. 러시아식 이름은 남마리아입니다. 린칭인의 장인은 당시에 코민테른에서 조선반도 책임자로 지내던 남만춘입니다. 남만춘은 러시아 교포인데, 원래 제정 러시아 군대에서 있다가 나중에 적군에 참가하고, 코민테른에서 고급간부가 되었습니다. 1921년에 린칭인은 몽골 혁명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국가수반입니다. 흥미롭게도 몽골은 당시에 아직 왕국이었고, 1911년에 임금이 된 스님, 즉 복드 칸이 있었지만, 1921년에 나라를 통치하는 세력은 소련의 적군과 그를 등에 업은 몽골인민당 지도부입니다.

전: 린칭인의 이야기는 북조선 소련파 이야기와 비슷해 보입니다.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1920년대 초 린칭인이 했던 역할은, 1940년대 말 북조선에서 허가이가 했던 역할과 똑같습니다. 허가이도 소련공산당 중급간부 출신으로서, 스딸린의 명령에 따라 북한을 도와주면서 감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파견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린칭인은 허가이보다 교육수준도 높고 열망도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사실상 그는 1925년까지 몽골을 통치한 사람이었습니다.

전: 공산국가가 된 뒤에도 당시 몽골은 형식적으로는 왕국이지 않았습니까? 언제부터 공식적으로 공산국가가 되었나요?

란코프: 여기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924년 복드 칸, 즉 대몽골국 왕의 사망입니다. 그 후에 몽골인민당은 나라를 공화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몽골에서 진짜 어려운 시대가 시작했습니다. 경제는 여전히 매우 낙후해 있었지만, 몽골인민당 지도부 내에서 매우 심한 종파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세계 어디든지 공산당의 역사를 보면, 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이후의 권력다툼이 심각했지만, 몽골만큼 심각한 이전투구 진흙탕 개싸움이 있었던 나라가 거의 없었습니다.

전: 개싸움이라고 하시니까 지난 번에 말씀하셨던, 그러니까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트로츠키, 스딸린 같은 소련공산당 지도자들 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생각납니다. 그만큼 몽골인민당 내 종파 투쟁도 치열했습니까?

란코프: 몽골인민당의 경우는1920년대 소련공산당의 개싸움보다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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