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과 오길남 가족사건

김주원· 탈북자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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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체류중 밀입북했다가 탈출한 오길남 박사가 2012년 6월 28일(현지시간) 북한에 남겨진 두 딸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서한을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에 전달하는 모습.
독일 체류중 밀입북했다가 탈출한 오길남 박사가 2012년 6월 28일(현지시간) 북한에 남겨진 두 딸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서한을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에 전달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윤이상 관현악단에 대해 2주간에 걸쳐 이야기 하다보니 윤이상 작곡가라고 하면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오길남 가족사건’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서독으로 망명하였던 윤이상 작곡가는 1967년에 있었던 ‘동백림 사건’의 여파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원한이 컸습니다. 북한의 대남통전부(통일전선부)에서는 반남조선, 친북조선인사인 윤이상 작곡가를 포섭하기 위해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접근하였고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도록 하였습니다.

평양시 대성구역 여명거리에 있는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는 해외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남공작원으로 양성하여 그들을 저들의 대남통일전략에 써먹기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한 수법들을 가리지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윤이상 작곡가를 위한다며 북한에서 매해 윤이상 음악회도 조직하고 윤이상 음악발표회도 진행하도록 하였고 윤이상 음악당도 지어주어 그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고 윤이상 작곡가에게 독일 등 외국에서 사는 한국국적의 국민들 가운데서 반정부 성향이 있는 국민들을 포섭하도록 지시하게 됩니다.

윤이상 작곡가의 포섭 대상에 오른 오길남(吳吉男, 1942생)씨는 1969년에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에 독일에 유학을 갔다가 북한에 자의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유학기간에도 독일에서 유신반대시위 등 반정부활동에 참가하는 과정에 윤이상 작곡가를 알게 됩니다. 대학 학부과정을 마친 오길남 씨는 독일 브레멘대학교 박사원(대학원)을 수료하고 1985년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그는 자주 재독 한인들이 진행하는 반정부시위에 참여하곤 하였습니다.

1974년 3월 1일에 독일에서 살고 있던 한국출신의 목사, 광부, 간호사 등 재독 한인들이 서독의 본에 있는 뮌스터광장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벌린 것이 기화가 되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재독한인단체인 ‘재독민주사회건설협의회’가 결성되었습니다. 결성식에 참가한 55인의 서명인 명단에는 윤이상 작곡가와 함께 오길남 박사의 이름도 올랐습니다. 북한당국은 이 협의회의 조직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북한당국이 경제난으로 해외 친북성향의 단체들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 협의회도 결국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선언문에서 주장하지 않았던 북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구호도 이후에는 반영된 것만 봐도 이 단체는 친북단체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이 단체의 의장인 철학 박사인 송두율씨는 1991년 북한의 사회과학원의 초청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김일성과도 직접 접견을 한바 있습니다. 그는 방북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심사과정에 “김일성 주석은 살아온 과정 등을 볼 때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나도 존경한다”고 진술하여 친북분자로 비난 받기도 하였습니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신숙자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딸 (오혜원과 오규원)을 두게 됩니다. 오 박사는 윤이상 작곡가의 권유와 북한 공작원의 여러 차례의 접촉으로 환상에 사로잡혀 1985년 12월에 가족을 데리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독일에서 대학 정교수로 근무하기 어려웠던 그에게 북한에 가면 그의 경제학 지식이 남북한 관계개선에도 도움이 되고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도 할 수 있다는 꾀임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탈출하여 가족과 헤어진 지 30년이 되는 2016년 11월 10일에 북녘 땅이 바라보이는 임진각에서 “나의 경제학 지식이 남북 관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한에 갔는데 모두 허구였습니다”라며 아픈 마음으로 당시를 회고하였습니다.

오길남 박사는 북한에 들어가서야 잘못한 선택임을 절감하였습니다. 경제학 박사였던 그는 북한에 가면 경제학 연구소나 대학교수, 정부 관련부처에서 일할 줄 알았지만 그에게 차례진 직업은 대남정책을 집행하는 ‘칠보산연락소’였습니다.

북한에서 1년 동안 공작원 교육을 받고 독일로 파견된 오길남 박사는 1986년 11월에 덴마크에서 극적인 탈출을 하게 됩니다. 그 후 6년 동안 아내와 두 딸을 북한에서 데려오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1992년에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하여 혼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오길남 박사는 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유학 중 유럽지역에서 활동하던 북한의 대남공작원에게 포섭돼 입북했으나 북한이 평소 꿈꾸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탈출할 기회만 노려왔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한국국적의 대학생을 포섭해서 데리고 귀국하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에 가기 위해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단마르크(덴마크)의 코펜하겐비행장(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망명하였고 1992년까지 6년 동안 줄곧 아내와 두 딸을 북한에서 구해오려고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북한에 생활한 1년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산하의 대남 흑색방송인 ‘구국의 소리’와 ‘민중의 메아리’ 방송에서 대남방송요원으로 활동하였고 공작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도 받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윤이상 작곡가와 독일 뮌스터대 송두율 교수, 재독 친북교포 김종한 씨 등이 나의 북한 입국을 적극 설득하였다”고 발표했습니다. 그의 발표에 대해 윤이상 작곡가와 송두율 교수는 “오길남 박사에게 입북을 권유하고 재입북을 협박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자 오길남 박사는 “언제 어디서든 윤이상 작곡가와 송두율 교수와 대질할 의향이 있다”며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인물들”이라고 반박하였다고 합니다.

오길남 박사가 북한에서 있을 때 칠보산연락소에 함께 근무했던 윤노빈 씨도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67년에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근무하였던 윤 교수는 오길남 박사보다 3년 앞선 1982년 9월에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북한으로 입북하였습니다.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지도원’이란 직책으로 평양시 대동강구역 동문2동에 살고 있던 윤노빈 씨는 대남방송에 출연하면서 ‘정영호’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오길남 박사가 북한에 있으면서 일했던 대남방송 요원 중에는 1969년 12월에 납북된 대한항공 여객기 여승무원들인 성경희, 정경숙 씨와 전 부산대 교수 윤노빈 씨 등 남한출신 입북자 15명이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르크스 철학과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져 월북을 결심했던 오길남 박사와 같은 많은 월북자들은 북한에 들어가서야 자기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지만 이것은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습니다. 오길남 박사가 주장하는 대로 윤이상 작곡가나 송두율 교수 등 타인이 설득한다고 해서, 북한 공작원의 간교한 꾀임을 받았다고 하여 쉽게 북한행을 결정한 그들에게 차례진 것은 한 가정의 영원한 이별과 참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었습니다.

가족을 찾으려는 오길남 박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과 전 세계가 지목하게 되었고 구출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졌습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북한당국은 2012년 유엔을 통해 “신숙자 씨는 요덕 수용소에서 간 질환으로 사망했고 두 딸은 살아있으나 아버지를 만나기를 거부한다”고 통보했습니다. 지난 2018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오길남 가족이 겪은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영화 ‘출국’이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북한식 사회주의는 김정은과 몇 명의 고위간부들에게는 천국이지만 절대다수의 인민들에게는 생지옥입니다. 인터넷도 개방하지 못하는 북한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온 가정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라며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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