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복구건설의을 위한 중국의 원조

김주원∙ 탈북자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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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평양 포로수용소의 모습.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평양 포로수용소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 여러분, 지난시간 1950년대 중반 부터 1960년대 초까지 북한당국이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이용해 두 나라들로부터 대북원조를 이끌어 온 내용을 얘기해 드렸습니다. 북한주민들은 6.25남침전쟁에서 중국지원군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전후 중국의 원조가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북한당국이 전후복구건설의 승리는 김일성의 현명한 영도의 결실이라고 선전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북한당국이 전후복구건설시기 중국으로부터 대북지원을 받기 위해 펼친 대중외교정책과 중국정부가 북한에 제공한 대북원조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에게 대북원조를 제공하는데 가장 역할을 한 것은 중국 초대 국무원총리를 지냈던 주은래(저우언라이)였습니다. 북한당국은 김일성과 주은래의 우애가 조중친선에 큰 역할을 한데 대해 언론들에 자주 소개하곤 합니다.

오랜 병환으로 입원 중이던 주은래가 사망하기 9개월 전에 김일성이 병문안을 한 내용을 북한당국은 노동신문을 통해 “수령님과 주은래 총리와의 혁명적 우애는 세계 정치사가 알지 못하는 숭고한 의리의 세계를 펼쳤다”며 “수령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려 몰라보게 상한 주은래 총리를 보시는 순간 눈앞이 흐려져 그를 부둥켜안은 채 아무 말도 못했고 눈물겨운 상봉 앞에서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가 뜨거운 것을 삼켰다”고 한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정부가 북한에 원조를 제공하는데서 조중상호원조조약(中-朝 友好合作互助条约)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61년 7월 11일에 중국과 북한사이에 체결된 이 조약은 북한을 대표해 김일성이, 중국을 대표해 주은래가 서명했습니다.

7개 조로 구성된 이 조약에서 제5조는 ‘쌍방은 주권에 대한 호상 존중, 내정에 대한 호상 불간섭, 평등과 호혜의 원칙 및 친선 협조의 정신에 계속 입각하여 양국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서 호상 가능한 모든 경제적 및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여 양국의 경제, 문화 및 과학 기술적 협조를 계속 공고히 하며 발전시킨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이 조약을 북한에서는 중국과 동등한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중국으로서는 역사적으로 종주국이 속국을 지원한다는 전통적인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후 1953년부터 1961년 북한이 1차 3개년계획과 5개년계획기간에 중국과 소련의 중소분쟁을 이용해 양측으로부터 원조를 최대한 획득해서 이득을 챙겼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북한과 중국사이에 처음 맺어진 경제협정이 1953년 11월 23일에 체결된 ‘중조 경제문화협력협정’입니다. 당시 중국 모택동 주석은 북한에 원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이것은 곧 중국을 위함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1950년대 중반 소련공산당 총서기 흐루시초프가 대북원조를 차관으로 전환하고 대북지원 규모도 제한할 데 대한 대북정책을 제시하자 김일성은 ‘자립적 민족경제’, ‘자력갱생’을 주장하였지만 중국으로 부터의 원조는 배격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백과사전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서 ‘경제사전’에도 ‘사회주의 나라들의 차관은 호상협조의 정신에 기초하여 제공되며 그에는 어떠한 정치적 부대조건도 붙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나라들 사이에 주고 받는 차관은 국제적 협조수단으로 된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원조나 차관도 그 어떤 정치적인 이해타산이 없는 사심 없는 원조라는 것을 당시 북한당국은 강조하곤 하였습니다.

모택동 주석은 1953년 11월 23일 ‘중조 경제문화협력협정’이 체결된 자리에서 “이 협정의 성격은 상호지원이다. 우리가 북한의 경제회복을 도와준다면 북한은 경제회복 후에 우리를 도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안보는 제2선에 있지만 북한은 안보의 제1선에 있기 때문이다....북한 공장들과 마을들의 회복은 중국의 안전과 발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북한에 대한 대북원조가 일종의 안보비용으로 보는 견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53년 11월 ‘중조 경제문화협력협정’이 체결되면서 중국정부는 1954년부터 1957년까지 8만억 위안의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중국 내에서의 반발을 의식해 체결 후 20일 동안은 언론보도를 하지 않았고 12월 10일에야 ‘북한에 대한 원조는 중국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는 내용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시기에 북한에 제공한 물자와 금액을 탕감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 숫자를 발표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달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중국정부의 원조로 전쟁으로 어려웠던 주민들에게 식량과 의류, 약품을 수입하여 공급하였고 석탄, 건축자재, 시멘트, 철강재 등을 구입하여 주택들을 건설하고 공장복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지원군은 4,107개의 교량건설과 5개의 댐을 건설하거나 복구하였고 8백여 리의 도로를 복구하였습니다. 그리고 240여 개의 학교를 세웠고 340동의 정부건물을 건설하였으며 180여 리의 철길을 복구하였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는 약 3천 여명의 산업연수생들이 중국의 39대 도시의 224개 공장과 광산들에서 기술연수를 받았습니다. 중국정부는 전쟁시기에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중국에서 키웠는데 이들 2,500명도 계속 중국에 남겨 기술교육울 받도록 해주었습니다. 1954년 한 해 동안에 중국정부가 북한에 제공한 원조는 중국예산의 3.4%를 차지하는 막대한 금액이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중국원조로 1955년에 대안전기공장과 평양방직기계공장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정부의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북한당국은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좀 더 원조의 양을 늘여달라고 요구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대한 중국 내 정부인사들의 반대의견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 무역부장이었던 리복춘(李福春)은 주은래 총리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첫째로,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은 생산목표를 너무 높게 설정하여 실현 가능성이 의문시되며, 둘째로 과도한 중공업 위주 투자로 농업과 경공업 분야는 낙후되어 있고 투자계획도 미미해 장기적으로 경제발전 전망이 밝지 않으며, 셋째로 중공업 제품은 질이 낮아 수출상품으로 가치가 높지 않으며, 넷째로 북한은 경제자립을 위해 자국의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국의 원조는 북한 내 경제영역뿐아니라 정치, 사회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쟁 시기 중국정부가 백만대군을 북한에 파견했지만 전후 소련정부가 10억 루불의 원조를 먼저 제공하면서 소련에 더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언론에서도 소련찬양만 강조하던 북한정부가 1954년 이후부터는 중국에 대해 정중한 예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들에도 중국의 원조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는데 당시 노동신문에 실린 1954년 3월 14일 기사 ‘중국인민들의 지성어린 원조’, 4월 2일 기사 ‘중국으로부터 원조물자 다량 도착’, 5월 30일 기사 ‘계속 증대되는 중국인민의 원조’, 10월 12일 기사 ‘의로운 중국 기술자들의 원조’, 11월 23일 기사 ‘6억 형제들의 원조 이 강토에 꽃 피리’ 등 입니다.

이렇듯 북한당국은 전후복구건설을 소련과 동유럽국가들뿐아니라 중국으로부터도 막대한 원조를 제공받아 성과적으로 진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김일성의 위대성 선전을 위해 이 모든 사실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북한당국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로부터 식량과 의약품 등 많은 지원을 받고 있지만 북한주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김정은의 영도업적을 선전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시간에는 1차 5개년 계획기간의 중국정부의 원조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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